저는 제가 경험해서 아는 것만 소개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제가 거의 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해 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영어 시험 얘깁니다.
우선 제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제가 캐나다에서 번역 일감을 찾기 시작했을 때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냥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링크를 따라 들어가서 등록할 곳에 등록하고 프로필을 만들고 비딩을 해서 첫 일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열심히 해서 제출하고 한 달 뒤에 보수를 받았습니다. 끝.
좀 심하게 단순화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크게 보면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제 번역가로서의 커리어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 블로그를 쓰기 시작한 후부터 한국의 번역가들의 사정에 대해 다른 분의 이야기도 듣고, 책도 읽고, 인터넷을 통해 다른 분의 체험기도 읽고, 무엇보다 이것 저것 검색을 꽤 많이 했는데, 그 과정에서 계속 눈에 밟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자격증, 그런 자격증을 따기 위한 시험, 그리고 그런 시험을 잘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학원(학원인지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등입니다. 참 의아했습니다. 저는 그런 것 전혀 하지 않고도 그냥 번역가가 되었는데, 마치 번역가가 되는 정교하고도 복잡한 과정이 있고 그 멀고도 험한 길을 시작하려면 일단 그 첫 단계로서 이런 곳에 다니면서 실력을 계속 쌓아야 하는 것처럼 묘사해 두었더군요.
저는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번역가가 되기 위해 무슨 점수나 자격증을 준비해 둔 일이 없이 그냥 번역가가 되었고, 또 지금도 그런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기 때문에 “한 마디로 그런 것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력을 쌓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항상 찬성입니다. 하지만 실력 쌓기의 일환으로 시험을 보는 것, 혹은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시험을 보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반대입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비용
사실 무슨 시험이든 시험이란 것이 실력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긴 하죠. 긴장감을 주어서 공부를 하게 만들 수도 있고요. 대학 다닐 때 어떤 선배는 자기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1년에 한 번은 토플을 보는 것이 자기 원칙이라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저는 그것 참 멋지다고 생각했죠. 그분은 게다가 불어 전공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시험 한 번 보는 데 얼마냐고 물어보았는데 대답을 듣고 나서 바로 포기했죠. :D 물론 그때 시험료가 얼마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굳이 볼 필요도 없는 굉장히 비싼 시험을 자기 각성 용도로 보는 것은 가난했던 제겐 꿈같은 일이었거든요.
2. 시험 성적과 실력의 상관관계
실력을 쌓기 위해서 돈이 들더라도 시험을 보겠다면 그거야 누가 말리겠어요?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도, 제가 영어 시험이라는 것을 평생 딱 두 번뿐이지만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있어서 나름 할 말이 좀 있습니다. 하나는 토플인데 캐나다에 유학 오기 위해 보았고, 하나는 IELTS라는 시험인데 이민 신청할 때 제출하라고 해서 시험을 봤습니다. 이 두 번의 시험의 결과는 모두 다 엄청 좋았습니다(다른 건 몰라도 시험 잘 보는 것이 제 특기라서… :D).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제가 시험 준비하면서 느낀 것인데, 참 시험이 잘 설계되었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시험 준비를 하나도 안 하고 보면 그 시험의 유형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성적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겠죠. 그러니까 어느 정도 준비를 해서 시험 시간의 길이나 출제의 경향이나 답을 쓰는 요령 같은 것을 익히면 확실히 점수가 더 잘 나오죠. 그러니까 모의시험을 서너 번 보고 나서 실제 시험을 보면 확실히 점수가 나아진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이상은 아무리 더 많이 준비해도 점수가 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험이 국제적인 공신력이 있는 것이겠죠. 다시 말해서 아무리 공부를 해도 기본 실력이 있는 만큼만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시험 구조가 짜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그런 시험 점수가 당장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그런 시험을 연습 삼아 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그 돈을 들여, 기본 실력을 향상시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3. 용도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잘 알려진 시험 두 가지를 제 평생에 딱 한 번씩 봤습니다. 두 번 다 성적을 제출하라고 해서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그런 시험을 왜 볼까, 왜 다들 그렇게 영어 시험 점수를 잘 받으려고 애쓸까 궁금했었습니다. 제가 나가는 교회가 토론토 다운타운에 있어서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온 젊은이들이 꽤 많이 찾아옵니다. 그 젊은이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스펙’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그 말도 잘 못 알아들었는데 이제는 좀 이해합니다. 시대가 변해서 제가 직장을 구할 때와는 달리 좋은 학교 졸업장 하나로는 턱도 없고 거기에 얹어 여러 가지 좋은 스펙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제가 재수가 없어서 정말 힘든 시대를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꼭 그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젊은이들 참 힘들게 삽니다(한국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들의 사정에 대한 기사 읽고 울 뻔했습니다. 국민소득은 캐나다와 비슷한데 한국의 젊은이들은 참 너무도 다른 세상에서 너무도 힘들게 살아가고 있더군요). 토론토에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온 학생들 중에는 여유가 있는 학생들도 가끔 있지만 별 여유도 없는데 그놈의 스펙이란 것을 위해서 이 물가 비싼 토론토로 어학연수를 오고 그 성취물로서 토익이라고 하는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따고 돌아가려고 하더군요. 전 요즘 젊은이들의 취업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지를 못하니까 별 할 말이 없지만, 적어도 번역을 위해서라면 그런 시험 준비는 당장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토플이나 IELTS 시험 같은 것이 좋은 번역가의 기준은 전혀 아닙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번역 처음 시작할 때 저는 경력으로 내세울 것이 하도 없어서 그런 시험 점수라도 레주메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점수를 아무도 이해도 못하고 이런 건 왜 여기 넣어두었을까 할 것입니다. 얘기가 엉뚱한 데로 빠지는 것 같아서 그만하겠습니다만 번역가에게는 어차피 그런 레주메도 필요도 없습니다.) 토플은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알아보는 쉬운 시험이고, IELTS는 영어 환경에서 생활하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측정하는 시험일 뿐입니다(general module의 경우). 그러니 둘 다 번역 능력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토익이라는 시험은 취업용 시험이라는 것 외에는 제가 잘 모르긴 한데, 아마 그것도 번역과는 거리가 한참 멀지 싶습니다.)
그러니 번역가가 되려고 준비하시는 분들은 그런 시험 준비하는 것, 그런 시험에서 더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노력하시는 것, 당장 그만두십시오.
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블로그를 쓰면서부터 한국 사이트를 많이 검색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초벌 번역사 자격증 시험’이라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게 뭔지 몰라서 참 의아했습니다. 한국에는 참 학원도 많고 자격증도 많고 단계도 많고 절차도 많은 것 같습니다. (소위 ‘초벌 번역사’라는 것만 해도 단계가 3단계나 되더군요.) 영어 실력을 늘리는 일에야 누가 무슨 반대를 하겠습니까? 하지만 무슨 자격증이니, 그런 것을 따기 위한 시험이니, 그런 시험에 합격하도록 지도해 주는 학원이니 하는 것을 잔뜩 만들어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갈 길을 모르는 젊은이들 앞에 또 하나의 헷갈리는 표지판을 세워두는 일, 또 하나의 장애물을 설치해 두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선 초벌 번역사라는 것이 뭔지를 정말 모르겠습니다. 초벌 번역사란 필시 완벽한 번역을 하지 못하는 낮은 단계의 번역사로서 고수 번역사를 위해 엉성하고 불완전한 번역을 하는 번역사라는 뜻일 텐데, 제 의견을 말하자면 그런 번역사는 존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번역이라는 것이 무슨 도자기도 아닌데, 초벌로 한 번 한 것 위에 고수가 한 번 더 손을 보면 더 단단해지거나 빛이 나거나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초벌 번역은 다듬는다고 좋아지지가 않습니다. 제가 이미 이 블로그에 프루프리딩에 대한 포스트를 6개나 올려 두고 거기서 프루프리딩이란 것에 대해 꽤 자세히 설명해 두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완성된 번역, 최대한으로 잘 번역된 것을 자기가 다시 보고 또 다른 사람이 새로운 눈으로 보아서 ‘실수’를 잡아내는 작업입니다.
그렇지 않고 실력 없는 사람이 엉성하게 작업한 것(오탈자나 실수로 무엇을 빠뜨리거나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의미 파악과 문장 구성도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고수가 제대로 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 프루프리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번역을 실제로 해 보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한번 해보라지요. 그게 어디 그렇게 되나. 사실 엉성하게 작업해 놓은 것을 고치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빠릅니다. (프루프리딩에 대한 이해 6을 읽어 보십시오). 심지어 상당히 잘 해 놓은 번역을 손질하는 것조차도 번역하는 것에 비해 시간이 그리 많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저는 개인적으로 프루프리딩 서비스를 아예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즈니스 전략에 속하는 것이고, 프루프리딩 서비스를 제공하는 번역가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작업에 대한 프루프리딩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프루프리딩과 번역은 전혀 차원이 다른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만약 소스 문서가 대충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것이 초벌 번역을 통해 고수 번역가가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굳이 비싼 돈 들여서 초벌 번역가에게 그런 것 맡길 것 없이 CAT tool에 넣어서 machine translation을 돌리면 됩니다. 그러면 한 10,000 단어 짜리문서도 약 3분, 길어도 5분이면 뚝딱 나옵니다. 이 무시무시한 컴퓨터의 속도를 초벌 번역가가 따라갈 수 있나요? (모르긴 해도 이 정도의 양을 초벌 번역가라는 사람이 사전 찾아가면서 더듬더듬 번역하려면 족히 두 달은 걸릴 걸요?) 그리고 소위 초벌 번역이라는 것이 소스 문서가 대충 무슨 뜻인지를 전달하는 것 이상의 효용을 제공할 수 있나요? 설령 그렇다고 한들, 초벌 번역이라는 것이 machine translation의 비용과 경쟁할 수 있나요? machine translation의 비용은 0원입니다.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자면 소위 말하는 초벌 번역이라는 것은 그 개념 자체부터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개념을 만들어서 그렇지 않아도 모호하고 애매한 길을 더욱 헷갈리게 만들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번역 비즈니스는 외국어를 국어로 옮기고, 국어를 외국어로 옮겨서 돈을 받는 비즈니스입니다. 거기에 ‘초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자기 번역에 대해 책임도 못 지는 ‘번역사’, 남이 다 뜯어고쳐 주어야 비로소 어느 정도 말이 되는 그런 작업 밖에 못하는 ‘번역사’, 그래서 남의 등 뒤에 숨는 무책임한 ‘번역사’가 설 공간은 아예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번역사’이든 ‘번역가’이든 그런 호칭을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초벌 번역이니 초벌 번역사 자격증 시험이니 하는 것을 보는 순간 짜증이 나고 이게 쓸모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직감이 왔는데, 그래도 제가 한국을 떠난 지 꽤 시간이 지난 터라, 혹시 제가 실수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감히 이것에 대해 쓰지를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김우열 님이 쓰신 책에 보니까 거기도 확실하게 나오더군요. (이 책은 ‘번역가를 위한 리소스’ 페이지에 가시면 링크가 있습니다.)
“물론 언젠가부터 번역사 자격증이니 하는 것이 생긴 듯한데, 상술이 만들어낸 의미 없는 자격증에 지나지 않는다.” (p. 19: 일본문학 번역가 권남희님의 추천사 중에서)
“출판 번역가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굳이 이런 번역 시험에 목 매달 필요가 없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지요.” (p. 50)
이것을 읽으니까 더욱 확신이 생기더군요. 제가 지금까지 쓴 것은 번역가가 되는 특별한 과정이 없으니 아무나 번역에 뛰어들면 된다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제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적성도 실력도 없는 사람은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정말 번역가가 되려고 하는 분은 위와 같은 여러 시험들, 토플이니 토익이니 IELTS니, 초벌 번역사 자격증이니 하는 것들을 거들떠 볼 필요가 전혀 없고, 그런 공부할 시간에 그야말로 진정한 외국어 실력을 쌓으시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와 진정한 실력을 쌓는 공부는 다르다는 것, 저도 알고 여러분도 알지 않습니까?